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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조선 말 격동기, 시대상을 반영한 집 보은 선병국 가옥
2006년 6월 28일 (수) 20:36:00 |   지면 발행 ( 2006년 6월호 - 전체 보기 )



보은 선병국(宣炳國) 가옥은 규모 면에서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힌다. 한국전쟁과 수해로 규모가 많이 축소됐지만, 아직도 그 당당함을 느낄 수 있다. 선씨 가문은 전라도 고흥군 금산면이 본향(本鄕)이다. 전라도 토박이로 지금도 보성에는 선씨 가문 출신 충신의 위패를 모시는 오충사(五忠祠)가 있다. 고흥에서 가문을 거부(巨富)로 만든 사람은 현 종손의 증조부인 선영홍(宣永鴻) 공이다. 종부는 당시 소작료로만 벼 만 석을 거두어들일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거부가 집을 지었으니 당당하고 거대한 장원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솟을대문 밖에 있는 군부대도 이 집의 소유이고, 현재 담으로 둘러진 곳만도 3000여 평이 된다니, 예전의 집 규모를 감히 어림잡기조차 힘들다.

선씨 가문은 단지 돈을 버는 데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증조부나 조부는 교육에 대한 투자가 남달랐다. 종부의 말로는 증조부가 이곳에 자리 잡은 후 교육에 많은 투자를 했다고 한다. 집 앞에 관선정(觀善亭)이라는 건물을 짓고 뛰어난 인재들을 모아 숙식을 제공하며 가르쳤단다. 그러한 교육에 대한 열의는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 한학자로 유명한 임창순(任昌淳 1914∼1999)도 여기 출신이다. 그렇다고 선씨 가문에서는 인재들을 모아 가르치면서 후에 어떠한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동량지재(棟梁之材)로 크기만을 바라면서 공부시킨 것이다. 과연 현재의 부자들 중에서 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인재를 육성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하다.

연화부수형 터에 ‘工’자형으로 앉혀

집터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하는 명당으로, 증조부인 영흥 공이 터를 잡아 이주했다. 집은 1919년에서 1921년에 걸쳐 당대 최고의 목수를 초빙해 지었다.

종부는 증조부가 이곳으로 이주해 잠시 기거할 집을 주변에 마련해 놓고 한꺼번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나무 중에는 멀리 춘양에서 가져온 것도 있다. 춘양목(春陽木)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과 소천면 일대의 높은 산 지대에서 자라는 소나무로, 그 속이 붉고 단단하며 껍질이 얇아 건축재나 가구재로 많이 쓰인다. 이렇게 집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선씨 가문이 지금의 삼성가에 비견될 만큼 거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선병국 가옥의 구조는 매우 특이하다. 사랑채, 안채, 사당채가 각각 담으로 둘러진 독립된 영역인 데다, 다시 집 전체를 담으로 둘러놓았다. 아마도 외부로부터 집을 보전하고자 이중으로 담을 두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안채와 사랑채가 완벽하게 독립된 구성을 한 것도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외부 담만 없다면 두 채의 서로 다른 집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이러한 구성은 안채와 사랑채 간의 연결은 철저히 하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로 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좌향을 남향으로 튼 사랑채와 서향으로 튼 안채의 평면은 모두 ‘工’자 형태이다. 이러한 평면 형태는 집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工’자 형태는 불길하다 하여 금기시하는 형식이라고 주장한다. 아산의 맹씨행단이 이러한 형태의 평면이지만 일반적으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工’자 형태의 평면 형식은 대칭성을 보여 주어 강한 권위를 드러낸다.

사랑채는 남향을, 안채는 서향을 한 이유가 명확치 않다. 사랑채의 남향은 당연하겠지만, 안채의 서향은 여러모로 불편하기에 잘 이해되지 않는다. 전체 배치를 보면 사랑채와의 연계를 생각한 것으로 추측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집의 권위를 한껏 높여

선병국 가옥은 일제시대에 지어졌다. 집을 지을 즈음에는 와해되기 시작한 조선시대의 규범과 신규범들이 혼재돼 새로운 사회 구조를 형성해 나가던 시대였다. 건축에서도 평면의 구성, 공법, 재료, 규모 등에서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에 보여 주었던 건축 규제가 흐트러지고, 새롭게 등장한 공업화된 재료를 사용한 것이 가장 눈에 띈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건물의 규모를 규제했다. 그 방법은 칸수와 기둥 높이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분 사회가 와해되면서 규제는 무의미해졌다. 경제력만 있으면 크고 좋은 집을 짓게 된 것이다.

선병국 가옥에도 그러한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기단과 초석으로 다듬은 돌을 사용했고, 당당하게 원기둥을 높이 세워 집의 권위를 한껏 높였다. 이렇듯 과거의 격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났지만, 그 나름대로 자제를 하려는 노력이었는지 처마만은 홑처마로 처리했다.

선병국 가옥이 이전의 집과 다른 점은 격식보다는 실용적인 부분에 보다 많은 배려를 했다는 것이다. 안채와 사랑채에 사용상의 편의를 위해 툇마루를 앞뒤로 다 깔았다. 전면과 측면은 퇴칸으로 툇마루를 처리했고,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뒷부분은 쪽마루를 깔았다. 그 때문에 안채나 사랑채 어느 곳이든 편하게 통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집을 실용적으로 꾸민 모습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안채의 대청이 안채 전체 규모에 비해 작다. 안방도 집의 규모에 비해 그리 크지 않다. 반면 방을 많이 드렸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집을 다양하게 쓰기 위함일 것이다. 또한 다락을 많이 드려 수납공간을 충분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실용성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이 집은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적 가치가 공고해 보인다. 안채와 사랑채가 별채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안채로 가려면 대문에서 돌아서 들어가야만 한다. 안채 입구에는 별도로 중문을 설치했다. 중문에서 안채로 들어가려면 다시 내외담을 돌아 들어가야 하기에 대문에서 안채까지의 여정은 지그재그의 궤적을 그린다. 그만큼 내외의 성격이 더 깊어졌다. 구조를 보면 20세기 초 지방의 상류층에서는 남녀유별에 대한 의식이 사회의 일반적인 추세와 달리 오히려 더 깊어졌던 것은 아닌가 싶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 빛이나

선병국 가옥의 여러 곳에서 솜씨 좋은 목수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안채 대들보는 자연적으로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려 사용했다. 이렇게 휘어진 나무를 다루는 목수는 그리 흔치 않다. 문짝을 보면 어느 한 곳도 소홀함이 없다. 안채의 곳간이나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 곳간의 광창(光窓)까지 비례가 잘 맞게 짜여졌다. 곳간 광창은 팔각형으로, 이러한 형식의 창문은 다른 집에서는 안채의 중요한 방에만 설치하지만 다락의 창문으로도 사용했다. 무엇보다 선병국 가옥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 규모에 있다. 사랑채나 안채의 규모가 너무 커 집의 구조가 한눈에 읽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채 마당이 웬만한 집의 부지 전체 크기다. 너무 넓어 축구장을 만들어도 될 것 같다. 안채 대청에서 마당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해진다. 사랑채도 마찬가지다. 워낙 대지가 넓어 집 주변을 돌아보는 데만도 한참 걸린다.

지금은 소나무가 많이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운치가 있었다고. 이 집을 지은 증조부도 소나무에 애착이 많아서 큰 소나무에는 소나무마다 관리인을 두어 관리할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이 집의 사랑채에서는 전통 찻집을, 안채에서는 고시원을 운영하고 있다. 고시원은 16년 전 이 근처에서 고시원을 운영하던 사람의 권유로 시작했다고. 이제는 전국적으로 알려져 대기하는 사람이 줄을 섰단다. 개인적으로는 문화재로 지정 받은 고택은 어떻게든 활용해야 한다고 본다. 전면 개조하지 않으면서도 찻집이나 고시원으로 고택을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안주인의 말로는 고시원을 하기 전에는 저녁 때 집에 들어오는 것이 매우 싫었다고. 깊은 밤 불꺼진 집에 들어올 때는 섬뜩하기까지 했단다. 이제는 늘 사람들이 있어 그러한 느낌은 없다고 한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 빛이 난다. 예전에는 하인들이 있어 주인이 집을 비워도 사람 사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제 하인들도 없는 집에 단 두 내외가 산다고 하면 적막하고 쓸쓸하기가 이를 데 없을 것이다.

선병국 가옥도 너무 넓어서 관리가 하기 힘든 집이다. 만일 이렇게 활용하지 않았다면 마당에는 잡초 우거지고, 불을 때지 않는 구들은 거북 등처럼 갈라지고, 마루와 나무는 갈라지고 터져서 그야말로 흉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종부의 말에 의하면 대청에 아무리 기름칠을 해도 사람이 밟고 지나지 않으면 윤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사람의 손길이 집을 만드는 것이다.田

최성호 / 사진 윤홍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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