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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당대 부호의 기풍이 묻어나는 강릉 선교장船橋莊
2008년 1월 3일 (목) 23:04:00 |   지면 발행 ( 2007년 12월호 - 전체 보기 )

한반도 남부에서 최고의 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함 없이 강릉 선교장船橋莊(중요민속자료 5호)을 꼽는다. 규모가 장대함에도 안온하면서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린다는 점이 나를 사로잡는다. 선교장은 짧은 글로 소개하기엔 너무도 아까운 건물이다. 보기 드물게 선교장은 집에 대한 이력을 잘 간직해 집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많이 받는다. 선교장의 주인은 이곳에서 만석꾼으로 불리던 거부巨富로 집도 그에 걸맞은 규모를 갖췄다.

같은 만석꾼이라도 넓은 들판을 가진 경상도나 전라도의 만석꾼과 지형이 좁고 척박한 영동지방의 만석꾼을 비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농사지을 땅이 부족한 이곳에서 만석꾼이 되려면 삼남지방보다 훨씬 광대한 토지를 소유해야 한다. 선교장 주인은 토지개혁으로 땅이 소작인에게 강제 분할되기 전만 해도 추수 때 거둬들인 곡식을 저장하고자 선교장 주변 말고도 주문진과 묵호에 따로 창고를 운영할 정도로 대단한 부자였다. 이러한 만석꾼의 집이었으니 얼마나 대단했을까? 선교장 입구에서 바라보는 행랑채의 위용이 바로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가세의 번창과 함께한 고택

선교장이란 이름은 ‘선교리船橋里’라는 이름에서 비롯했다. 지금 선교장 앞은 넓은 들판이지만 문헌에는 ‘예전엔 경포호가 이곳 앞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현재 경포호는 호변이 4㎞ 남짓한데 예전에는 12㎞로 지금보다 3배 정도 더 넓었다. 따라서 옛날에는 배를 타고 선교장이 자리한 마을로 들어가야 했기에 선교리라는 지명이 생겼고, 그것을 따서 선교장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곳에 처음 집터를 잡은 사람은 청주에서 옮겨온 이내번李乃蕃이다. 그는 효령대군 11대 손으로 어머니와 충주에서 분가해 저동에 자리잡고 가산을 불린 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 배경은 족제비가 무리지어 이동하는 것을 보고 이내번이 신기하게 여겨 쫓아가다 족제비가 홀연히 사라진 곳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명당자리여서 이곳에 집을 새로 지어 옮겼다고 한다. 어쨌든 이곳으로 옮긴 후 손자 때까지 가세가 급격하게 불어 영동지방 호족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선교장은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처음의 모습은 지금의 안채를 중심으로 한 영역이었을 것이다. 후손이 쓴 《강릉 선교장》이란 책에서도 안채를 이내번이 1760년 지은 집으로 추정한다. 그후 이내번의 손자인 이 후가 사랑채인 열화당(1815년)과 활래정活來亭과 연못을 조성했고, 이 후의 아들인 이용구가 서별당西別堂을 지었다.

동별당東別堂은 이용구의 손자인 이근우가 1920년경에 지었다고 한다. 또한 안채 앞의 새로 복원한 동별당은 이 후의 아들인 이용구가 분가한 동생을 위해 마련한 것이다. 이 밖에도 열화당 앞 행랑채 밖(연못과 행랑채 사이)에는 이근우가 소실에게 지어준 집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건물 외에도 선교장 주변에는 하인들이 살던 수십 채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대저택인 선교장은 이처럼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그 과정은 집안의 번영과도 무관하지 않아, 가세가 커가면서 그에 걸맞게 집을 조금씩 증축해 현재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부호들이 선호하는 겹집구조

선교장의 영역은 크게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안채를 중심으로 동별당, 서별당을 아우르는 가족을 위한 사적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열화당을 중심으로 한 공적 영역이다. 부를 어느 정도 쌓은 후 선교장 가문은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선비와 교류하며 시문을 즐기는 생활을 시작한다. 이내번의 손자 이 후는 ‘처사공’ 또는 ‘오은거사’로 불리는데 이러한 그의 행적으로 미루어보아 새로운 교류의 장소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장소로 열화당과 활래정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도 열화당과 활래정은 막대한 부를 기반으로 한 적극적인 인적 교류의 장으로 쓰였다.

이러한 내적 구성은 외관에서도 드러난다. 선교장에는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둘인데, 일반 반가班家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을 드러내놓고 둘로 만드는 예는 드물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을 두더라도 대부분 눈에 띄지 않는 측면이나 배면에 은밀하게 설치한다. 그러나 이곳에선 집의 규모가 크다보니 그러한 모습을 만들기조차 쉽지 않았다. 선교장의 대문 격인 사랑채로 들어가는 솟을대문은 다른 집과는 다른 모습이다. 여타 집들은 진입로와 대문의 높이 차를 계단으로 처리하는데 이곳은 경사로를 만들어 놓았다. 이 경사로는 아마도 기능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워낙 거부이다 보니 집 안으로 들고나는 재물이 많아 일일이 사람 손을 빌리기보다는 우마차로 나르는 것이 편했을 것이다.

선교장의 중요한 집들은 모두 이곳 영동지방의 특징인 겹집구조를 원칙으로 삼았다. 안채, 사랑채인 열화당, 작은 사랑채, 동·서별당 등 중심 건물 모두 이러한 겹집구조는 추운 지방의 생활에 맞도록 만들어진 겹집구조이다. 한편 이러한 구조는 선교장 가문처럼 부호들의 삶에도 적절하다. 홑집에 비해 간살을 마음대로 변형하기에 방의 규모를 기능에 맞게 꾸밀 수 있기 때문이다. 선교장은 이러한 특성을 잘 살려서 필요에 따라 안채나 사랑채 모두 방의 규모를 조절하는 구조이다.

키 높이 기단에 올린 열화당

선교장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곳은 큰사랑채인 열화당으로, 당호堂號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한 구절인 ‘悅親戚之情話(열친척지정화) 樂琴書以消憂(락금서이소우)’라는 글귀 중에서 ‘悅’·‘話’라는 글자를 따와 지은 것이다. 위 글은 ‘친척들과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를 떨쳐버린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름은 오은거사인 이 후가 형제들과 함께 이곳에서 정담을 나누고 싶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내번이 고향인 충주를 떠나 머나먼 강릉으로 터전을 옮겨 그의 손자인 이 후 때까지 겨우 삼대를 살았다. 아마도 친인척이 없는 이곳에 자리잡기까지 그리 쉽지는 않았을 터. 아버지 대에 겨우 형제들이 생겼으니 형제 간의 정이 몹시도 중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당호에 절절히 배어난 것이다.

열화당은 찬찬히 곱씹어 볼 집이다. 사람 키 높이의 높은 기단 위에 당당히 서있는 집은 올려다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왜 이런 집을 지었을까. 아마도 열화당을 지을 때 앞에 행랑채가 없었을 가능성이 많다. 원래 안채의 모습은 ‘ㅁ’자형이었다고 한다. 더불어 옆의 서별당 영역이 사랑채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열화당은 주변 풍광을 즐기며 객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계획했고 그러한 기능에 맞도록 높은 기단 위에 집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거대한 부를 축적한 이후 자신을 대외에 과시하기 위한 의도로도 보인다.

두 개의 달을 감상하는 즐거움, 활래정

선교장의 또 다른 멋을 담은 활래정은 지을 당시만 해도 멀지 않은 곳에 경포호의 끝자락이 보였다고 한다. 그 풍광은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정취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보름달이 뜨는 밤, 정자에 앉아 인위적으로 조성된 방형 연못에 떨어진 달과 넓게 펼쳐진 경포호에 떨어진 달을 같이 바라보는 즐거움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지금 활래정 앞 연못에는 가산假山이 있다. 예전에는 정자에서 가산까지 나무다리가 놓였다고 한다. 현재의 활래정은 일제시대 다시 지은 것으로 아쉽게도 건물의 격이 조금 떨어진다.

선교장은 우리나라 최고이자 제일 큰 집이다. 매년 선교장의 매력을 느끼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러나 지금 선교장 주변의 모습은 예전의 당당함과 기풍을 찾기에는 아쉬움이 많다. 선교장 앞에는 장사를 위한 조잡한 초가가 자리잡아 안온한 마을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 이러한 모습은 앞으로 점점 더할 것이다. 관리의 어려움을 십분 이해하지만 주변 환경에 보다 신경을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田

최성호<산솔도시건축연구소 소장/전주대 겸임 교수>·사진 윤홍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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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고택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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